(계 1: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있었더니
(계 1: 10-11)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큰 음성을 들으니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교회당이라는 공식적인 건물을 가지지 못했다. 각 도시마다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1%를 제대로 넘지 못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도 어려웠고 박해 속에서 교회당을 가지는 것이 어려웠다. 주로 가정이나 동굴 등에서 모였다. 공식적인 교회건물을 가지게 된 것은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이후 기독교가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4세기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인들이 오늘 같은 교회당을 가지지 못하고 가정이나 동굴에서 집회를 가졌다. 요한이 편지를 보낸 아시아 일곱교회도 그 지역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보낸 것이지, 건물이나 교회당에 보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냈던 일곱 교회의 교회당이나 교회당이 있었던 터를 찾겠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일이다. 지금 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었던 지역에 남아있는 교회당 터는 가장 오래된 것이 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의 교회당 터이다. 비잔틴 시대의 교회당은 때로는 신축되기도 했고, 때로는 이방신전이나 공회당 건물을 교회로 바꾸어 사용했다. 사도 요한시대 아시아 일곱 교회의 교인들이 지금 비잔틴 교회터가 있는 그곳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비잔틴 교회터가 있는 그 지역 어딘가에서 아시아 일곱 교회의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