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조금 더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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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조금 더 느리게

김경욱 0 3,951 2016.03.20 00:41
느리게 조금 더 느리게


글 츠지 신이치

시간도둑의 정체
카메라맨으로 일하는 제 친구, 이와타 모리오 씨의 경험담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어느 날 밤 전철역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어느 술 취한 남자가 몸을 부딪치며 술 냄새 풍기는 입을 귀에다 대고는 “빨리 올라가란 말이다! 더 빨리!”라고 속삭였습니다. 자신의 속도를 얼마나 잘 지키느냐 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주제라는 이와타 씨이지만, 이때 만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뒤를 돌아 화를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어디론가 휙 하고 사라져버린 뒤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저는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그 남자는 뭐였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신사와 같은 일종의 귀신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 등 뒤에도 비슷한 귀신이 달라붙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고 보면, 가끔씩 정말로 그런 식의 속삭임을 들었던 느낌이 들지 않나요? ‘서둘러! 더 빨리 서둘러야 해!’라는 속삭임을요.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면 거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우리 뒤에서 항상 우리를 재촉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이와타 씨나 모모나 많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보이는 것들이 우리 어른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람(어쩌면 귀신)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도둑은 도대체 누굴까요? 앞서 한 가지 답을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 세상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사회는 경제를 중심으로 짜인 구조이지만, 정말 중요한 인간관계는 경제 주변에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의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도 그러한 경제 구조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이미 그 구조 속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있기 때문에, 결국엔 우리  자신이 바로 시간도둑일지도 모르겠군요.


츠지 신이치 님은 '아규'라는 한글이름을 가진 재일동포이다. 문화인류학자와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며 메이지학원 국제학부 교수로 있다. "100만인의 캔들나이트" 홍보대사로, 슬로 라이프를 제창하는 시민단체 "나무늘보클럽"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슬로우 이즈 뷰티풀》,《슬로우 라이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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