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목욕문화
1.온난다습한 풍토와 '온욕'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목욕을 좋아한다. 그것도 뜨거운 물에 목욕하기를 좋아한다. 게다가 목욕법도 독특해서, 깊은 목욕통에 몸을 푹 담그지 않으면 안 된다. 얕은 욕조에 샤워가 딸린 서구식 욕실은 일본인에게는 욕실이 아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의식주의 거의 모든 면에서 기능적인 서구식 생활 양식이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목욕만은 예외다. 호텔이나 일부 아파트를 제외하면 서구식 욕조 보급률은 아주 낮다. 거의 모든 사람이 뜨거운 물을 듬뿍 채울 수 있는 일본식 깊은 목욕통, 즉 '고에몬부로(五右衛門風呂)'식 욕조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온 외국인들은 대부분 이 목욕통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목까지 뜨거운 물 속에 담그는 일본인의 습관이 우선 그들을 놀라게 한다. 게다가 온천이나 센토(錢湯)로 대표되는 대중탕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목욕하는 습관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알지도 못하는 남들과 알몸을 맞대고 목욕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면 부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본인 특유의 그런 목욕 습관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우선 일본의 기후 풍토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일본열도의 양쪽 끝에 있는 훗카이도와 오키나와는 기후나 식생에 큰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온난다습하다고 해도 좋다. 여름과 겨울의 차이도 크다. 여름은 무덥고, 겨울에는 추위가 혹독하다. 여름에는 해양성 기후(고기압)의 영향을 받고, 겨울에는 대륙에서 발달한 차가운 기단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통계국에 따르면, 도쿄의 연평군 기온은 15.3도, 습도는 66퍼센트, 월평균 최고 기온은 8월의 26.7도, 최고 습도는 7월의 77퍼센트(둘 다 1951년부터 1980년까지의 평균치)다. 이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여름은 유난히 무덥다. 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일본열도에 많은 열과 수증기가 물려오는 것이다. '불쾌지수'라는 표시가 생겨난 것도 일본이다. 불쾌지수가 80을 넘으면 모든 사람이 불쾌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일본의 여름은 거의 날마다 그런 상태에 있다. 당연히 몸은 땀 투성이가 되어 끈적거린다. 그래서 목욕의 필요성도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여름철에는 냉수욕을 하거나 목물을 해도 되지만, 겨울철에는 그럴 수도 없다. 일본에는 추운 겨울도 있다. 그래서 뜨거운 물로 몸을 덥히면서 씻을 필요가 생기고, 여기서 목욕통이라는 형식이 발달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요컨대 일본인의 '온욕' 습관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기후 풍토와 깊은 관계를 갖고 발달한 것이다.
2.약을 좋아하는 일본인과 온천
일본열도는 화산대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화산 활동의 부산물로 각지에 온천이 솟아난다. 물의 양은 어쨌든, 그 수에서는 세계 제일을 자랑한다.
현?일본의 온천은 약 2200군데나 된다. 애당초 원초적인 온천 목욕통(욕조)은 저절로 솟아나는 뜨거운 물을 돌로 둘러싼 작은 웅덩이에 불과했다. 오늘날에도 각지에 남아 있는 강변의 노천 목욕탕 같은 것이다. 온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일본의 기후 조건을 생각하면 가까운 마을 사람이나 지나가는 나그네가 땀을 씻어내고 몸을 쉬기 위해 뜨거운 물이 솟아 나는 곳 주변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는 자연발생적 기원을 상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어쨌든 일본인이 예로부터 온천을 즐겨 이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선 온천에 가면 언제든지 뜨거운 물에 마음껏 몸을 담글 수 있다는 편리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온천의 의약적인 효능에 마음이 끌린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다. 일본인은 원래 약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그것은 예로부터 전국 각지에 약사당이나 약사여래상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온천에서 의료 효과를 구하는 것은 세계적인 공통점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일종의 정신적 효능도 기대하고 온천에 몸을 담근다. 모르는 사람끼리라도 알몸으로 함께 욕조에 들어간다. 과학성이라는 점에서는 굳이 알몸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목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안심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3. 한증막의 계보
일본인이 일상적인 온욕 습관을 갖게 된 것은 애도 시대 중기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전에도 각지에 온천과 짝을 이루는 형태로 '한증막'이 존재했다. 요즘 말하는 '사우나탕'의 원초적 형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후로(風呂)'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 '후로'라는 말도 이시무로(石室)를 이용한 한증막에서 유래한 모양이다. 이시무로의 '무로'가 전와하여 '후로'라고 불리게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한증막의 또 다른 갈래로 '가마후로( 風呂)'가 있다 이것은 돌을 쌓아올린 다음 그 표면에 흙을 발라 굳혀 도자기 가마처럼 주위를 둘러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가마 안에서 솔잎이나 생나무를 때고, 그것이 다 탔을 무렵에 물로 적신 거적을 씌운다. 그리고는 그 위에서 수증기를 쐬면서 느긋하게 쉬는 것이다. 교토의 야세에 있는 '가마후로'가 잘 알려져 있다.
자연을 이용한 이런 한증막이 발달한 한편, 큰 사찰에는 거의 한증막과 같은 형태의 욕당이 설치되었다. 사찰에서는 한증막과는 별도로 가마솥에 끓인 물을 욕조에 붓고 그 물을 퍼서 몸을 씻은 목욕 형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목욕통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거기에 몸을 담그는 목욕법은 근세가 된 뒤에야 비로소 발달했다.
4. '동냥 목욕'의 풍습
쇠로 만든 냄비나 솥이 부족했던 시절, 모든 집에 목욕통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쇠는 여전히 귀중했고, 큰 목욕솥은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목욕통이 있는 집에 가서 목욕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동냥 목욕'의 풍습이 생겼다 .또는 몇 집이 공동으로 목욕통을 설치하고 며칠만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해서 목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을 '공동 목욕' 또는 '목욕계(契)'라고 불렀다. 이런 형태는 주로 농촌이나 산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한편 도시에서는 이런 공동 목욕의 발상이 '센토'로 발전했다. '공동 목욕'의 규모를 확대하여 장사를 한 것이 센토다. 헤이안 시대에 교토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센토가 일반적으로 보급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센토도 처음에는 한증막 형태가 많았던 모양이지만, 이윽고 '도다나부로(戶棚風呂)'나 '자쿠로부로( 榴風呂)'가 고안되었다. 도다나부로는 지붕을 씌운 목욕탕 바닥에 뜨거운 물을 넣고 증기욕과 온욕을 동시에 즐기는 것이다. 자쿠로부로는 수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몸을 씻는 곳 안쪽의 욕조로 들어가는 입구가 낮게 만들어져있다. 그 입구를 '자쿠로구치( 榴口)'라고 부르는데, 박공이나 기둥문의 구조와 목각으로 화려한 아름다움을 다투었다.
메이지 시대가 되면 자쿠로부로 대신 이른바 '개량 목욕탕'이 등장한다. 개량 목욕탕은 온천장의 욕조 형태를 응용한 것인데, 욕조를 마룻방 바닥에 설치하고 뜨거운 물을 가득 넣는 동시에 수증기가 빠져나가는 창문을 설치하는 등, 자쿠로부로에 비해 훨씬 밝고 개방적이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센토의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센토와 '이리코미'
에도 시대 중기 이후는 온천이나 센토가 급속히 보급된 시대였다. 그때까지의 공중 목욕탕은 자연발생적이었고 불교의 영향을 받은 뒤에는 사회복지의요소도 갖추게 되었지만, 에도 시대 중기는 그것이 시설을 갖춘 하나의 영업형태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저절로 솟아나는 뜨거운 물이나 온수를 모아두거나(온천) 솥에서 끓인 물을 담아주는 데 그쳤을 뿐, 그 이상의 발전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여 메이지 시대 말에서 다이쇼 시대(大正時代)로 접어들면 보일러식 소토가마가 등장한다. 이 무렵은 마침 서구의 선진 문명이 일본 각지로 퍼져 나간 시대이기도 하다. 각종 박람회가 열리고, 나이토식(內藤式) 목욕솥처럼 열효율이 높은 보일러식 소토가마가 보급되었다.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昭和時代)에 걸쳐 센토도 더 좋은 시설을 갖추고 대규모화되었다. 집집마다 실내 목욕탕이 서서히 보급된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일찍이 일본에서는 남녀 혼욕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대중욕은 '남녀 혼욕'을 의미했다. 사실 과거의 일본인은 알몸에 대해 아주 너그러웠던 점이 있다. 온천이나 센토만이 아니다. 서일본 각지에 있었던 한증막 계통의'가마후로'나 '이와후로'에는 남녀가 함께 들어가는 게 당연했고, 일본 지역에는 최근까지도 그 풍속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목욕탕에서의 '이리코미(혼욕)'로 욕정을 자극 받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각 지역 사회에는 나름대로 불문율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민중은 자신들의 사회 생활을 평온하게 유지하기 위해 현명하게 행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6.우키요도코와 유나
'유나'(湯女:대중탕에 딸려 있던 창녀)가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에도 시대부터다. 센토가 지금은 남탕과 여탕으로 나뉘어 있지만, 원래는 남녀 혼탕이었다. 그리고 지방의 온천장과는 달리, 불특정 다수의 남녀가 혼욕하는 에도라는 도시의 센토에서는 난잡한 분위기도 생겨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중탕에는 욕실 안에 유나를 두고 음식을 먹거나 노는 '우키요도코(浮世床)'라고 불리는 일종의 살롱이 있었다. 하지만 에도 시대 후기가 되면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여탕과 남탕의 구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전통을 가진 남녀 혼욕은 메이지 시대 초기에 정부나 지방의 거듭된 금지령에 차츰 쇠퇴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시내의 센토는 요즘처럼 남탕과 여탕으로 분리되었지만, 온천장에는 아직도 남녀 혼욕이 남아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인의 이런 목욕 풍속은 형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부분적으로는 차츰 쇠퇴하고있지만, 그 풍속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져 갈 지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