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지명들은 스리랑카 옛 지명의 판박이다
일본의 옛 지명들은 스리랑카 타밀지명의 판박이다
츠시마, 하카다, 기비고원, 무코노(고베의 옛이름), 난니와(오사카의 옛이름), 사카이, 가와치,나라, 나고야, 에도(도쿄의 옛이름)등 그대로 복사판
.......야마토는 스리랑카왕국의 왕궁이름
필자는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거북모양의 배를 타고 스리랑카 섬에 도착, 새 왕국을 건설한 비자야왕(King Vijaya, 재임 기원전 543-504 )과 약5백년후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42-199)의 이야기를 비교하여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卑彌呼, 일본어 발음은 '히미코')가 가야인이라고 주장했었다.[경향신문 주간지 뉴스메이커 692호, 2006년 9월 15일자]
이는 토론토 주재 스리랑카 영사관의 외교관들, 토론토대학교의 스리랑카 출신 교수들, 그리고 스리랑카 출신의 타밀 교수와 교사들, 힌두교및 불교 성직자들과 직접 만나 취재한 결과이다.
약40년의 비자야왕 통치기 전후의 스리랑카 역사및 지리를 더 추적한 결과, 비자야왕의 첫 국무총리(당시 명칭은 '비미호'였음) 이름이 '묘견(妙見)'이었고,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는 당시 왕궁의 이름임을 확인했다. 당시 스리랑카의 인명,지명, 관직명등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三國史記)및 중국의 삼국지(三國誌), 그리고 일본책등에 나오는 것들과 그대로 빼어박았음을 다음의 이야기가 놀랄정도로 전해준다. 비교참고를 위해 한자를 병기했다.
"비자야왕이 인도에서 거북모양의 배, 즉 '가라파(Karapa, 河童)' 를 타고 스리랑카섬으로 향하던 중 제일 먼저 목격한 섬은 '츠시마'(對馬)섬이다.곧 스리랑카 섬의 서부해안에 도착, 그곳을 '하카다'만(博多灣, 일본 후쿠오카의 해안지역)이라고 불렀다.비자야왕이 추종자들의 추대에의해 스리랑카왕국의 초대왕이 된뒤 자신의 추종자들가운데 국무총리격을 '비미호(卑彌呼)'라고 칭했다.
그 아래에 관리들의 주요 직책들을 '이지마(伊支馬)', '미마승(彌馬升)','미마획지(彌馬獲支) ', '노가제(奴佳鞜)'라고 차례로 정했다. 최초의 비미호 이름은 '묘견(妙見), 또는 마헤간'이고 그 동생의 이름은 '선견(仙見), 또는 신견'이었는 데 '비미호 묘견'은 '선견'의 조언을 받아 국정을 운영했다.
'비미호 묘견'은 '하카다'부근에다 비자야왕의 궁전을 지어 타밀어로 '사마테' 또는 '사마타이'(邪馬台), 싱할리어로는 '야마타이'라고 명명했다.이는 '평화(=peace)'를 뜻한다.
비자야왕은 인도남부에서 초빙한 타밀공주 야소다라(Yasodhara)에게서 12명의 딸을 낳는다. 12명의 딸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면 Kara(加羅) , Anla(安羅) , Tara(多羅) , Kocha(古嵯) , Chata(子他) , Sanbanha(散半下) , Cholma(卒麻) , Kolchan(乞飡) , Saigi(斯二岐) , Yomrye(稔禮) , Taksun(卓淳) , Takkitan(啄己呑) 이 된다.
또 스리랑카에 불교가 공식 도입된 기원전 3세기보다 약 2백년 앞서 통치했던 비자야왕은 힌두교를 믿었던 터라 힌두교 3대신의 하나인시바(Shiva),부인 파르바티(Parvati) , 두 아들 가네쉬(Ganesh)와 무루간(Murugan)을 각각 '이비가지(夷毗訶之)', '정견(正見)', '뇌질주일(惱窒朱日)',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불렀다.
비자야왕이 왕위에 등극하기전부터 이미 추종자들은 '하카다'에서 동쪽으로 '세토(瀨戶) ' 강(일본에선 '세토 內海')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스리랑카 내륙에 '임나(任那)'와 '미마나(彌摩那)'등 새로운 마을들을 개척했다. 비자야왕 통치기및 그 이후 스리랑카인들은 고원지대를 만나 '기비(吉備) 고원'이라 칭했고 무코노(務右, 고베의 옛 이름) , '나니와'(難彼, 오사카의 옛이름), '가와치'(河內), '사카이'(堺)등을 구축했다.
그 부근에 새 왕궁을 짓고 '사마테'나 '야마타이'에서 약간 변형시켜 타밀어로 '사마토', 싱할리어로 '야마토' 라고 이름붙였다.그 의미는 '큰 평화(Great Peace)'이기에, 한자로 표기하면 '大和'이며 '야마토'궁전을 담당하는 책임자를 '오키미(大君, '천황'의 옛이름)', 그리고 '야마토'궁전이 있는 도시의 책임자를 '미카도(御門, '천황'의 또 다른 옛이름)'라고 불렀다. '오키미'와 '미카도' 아래에 고위관리로서 '우치'와 '가바네'등을 차례로 두었다.
'야마토'궁에서 더 나아가 '나라(奈良)', '나고야 (본래 '나가오야'의 줄인 말,那古野, 名古屋)' ,'에도'(江戶, 도쿄의 옛이름) 등 새 도시들을 차례로 건설한다."
이들 명칭가운데 특히 일본지명과 같은 스리랑카 지명들은 거의 전부가 당시 타밀어 발음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비자야왕및 그 추종자들을 가야인으로 대체하면 가야인들이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섬에다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스리랑카 섬 역사및 지리에서의 명칭들을 차례로 붙여나가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가야인들이 한반도를 인도로, 일본 섬을 스리랑카 섬으로 감정이입시키는 대위법을 적용한 것이다.
더구나 비자야왕대신에 수로왕의 딸 '묘견'공주로 대체하면 바로 이종기선생의 주장과 완전 일치한다.이종기선생께서는 수로왕의 딸 '묘견'공주일행이 거북모양의 배, 즉 '가랏파(河童)' 를 타고 큐슈섬에 도착, '사마태'왕국을 건설하고 동생 '선견'왕자의 조언을 받아 국정을 운영했다고 강조했다.
또 중국의 『삼국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선 " 비미호여왕의 사마태국에선 관리들의 주요 직책들을 '이지마(伊支馬)', '미마승(彌馬升)','미마획지(彌馬獲支) ', '노가제(奴佳鞜)'라고 차례로 정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아울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최치원(崔致遠)의 <석리정전(釋利貞傳)>을 인용하면서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으니, 뇌질주일은 곧 이진아시왕의 다른 이름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비자야왕과 타밀출신의 야소다라공주사이에 낳은 12명 딸의 이름이 가야지역에 있던 12개 소국의 이름으로 바뀌며, 최초의 국무총리 명칭 '비미호'가 왜국의 초대 여왕 이름으로,궁전 이름 '사마테'와 '야마토'가 각각 일본 왕국의 이름들로 바뀌었을 뿐 전체적인 큰 틀은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
특히 '사마테'를 우리말 발음에따라 음차(音借)하여 한자로 邪馬台로 표기했는 데 이는 비미호여왕이 가야계였음을 반증한다. '사마테' 또는 '야먀타이'는 '평화(Great)'를, '사마토' 또는 '야마토'는 ' 큰 평화(Great Peace)'를 뜻하는 데 이를 훈차(訓借)한 결과, 한자어로 '대화(大和)'라는 조어가 탄생한 것이다. 비미호여왕의 사마태왕국시절엔 스리랑카의 명칭들을 우리말 발음대로 한자로 표기했으나 그 이후 야마토정권부터는 고대 일본식 한자표기가 자리를 잡기시작하면서 스리랑카명칭들을 일본식 발음으로 한자 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에서 大가 '야마'로,和가 '토'로 발음되는 경우가 야마토(大和) 단어가 유일한 데 이는 스리랑카의 외래어 단어를 훈차(訓借)하여 한자어로 만들었기때문이다.지금까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야마'는 산(山)에서, '토'는 장소(所)에서 그 발음을 따와 만든 것이며 비미호여왕의 '사마타이'와 관련이 있다고만 막연히 유추할 뿐 그 본질적 어원을 아직 정확히 캐지 못하고 있다.
반면,스리랑카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에 타밀어보다 싱할리어가 우세하면서 '츠시마'(對馬)섬이 '만나(Mannar)'섬으로, '하카다'가 '반칼레'(Vankalai)로, '세토(瀨戶)' 강은 '아리비 아루(Aruvi Aru)'강으로, '무코노(務右, 고베의 옛 이름)'는 '만쿨람(Mankulam)'으로, '가와치'(河內)'는 '메다와치야(Medawachiya)'로, '나니와(難彼, 오사카의 옛이름)'는 '니카웨와(Nikawewa)'로, '나라(奈良)'는 '마하라마(Maharama)로, '나고야(名古屋)' 는 '마하오야(Mahaoya)'로, '에도(江戶, 도쿄의 옛이름)' 는 '에도마(Eethoma)'로, 그리고 '미마나(彌摩那)'는 '미미나(Mimina)'라고 싱할리식 발음으로 각각 명칭이 변경돼 현재 불려지고 있다. 스리랑카에선 이들 고대 도시들이 지금은 쇠락해 현대적 대도시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고대 도시 졸본성이나 부여등이 그러하듯이. '기비(吉備)고원, '사카이(堺)'등은 지금도 여전히 같은 명칭으로 남아있다.
한편, 비미호여왕과 그 종실 일여(壹與)여왕이후 등장한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의 야마토정권이 출범하는 데 최고 통치자인 왕을 칭하는 '오키미(大君:王)' 또는 '미카도(御門, 군주가 머무는 거소, 즉 군주를 가르킴)'가 군림, 세습제가 확립된다.그런데 ' 오키미(大君:王)' 는 당시 스리랑카에서 '야마타이'나 '야마토'등 왕궁의 관리를 담당했던 왕의 비서를 가르키던 Ookimi와, 그리고 미카도(御門)는 당시 왕국의 수도를 담당했던 시장격인 Mikado와 각각 완전 일치한다.일본의 야마토정권은 이 두 단어를 동일시하여 최고 통지자의 명칭으로 삼았던 것이며 7세기경에 '덴노(天皇, 천황)'로 바꿔부르기 시작한다.
야마토 정권을 지탱하는 관료조직 체계는 씨성(氏姓)제도인 데 귀족계급을 지칭한 '우지(氏)'와 '가바네(姓)'도 당시 스리랑카 왕국에서 Ookimi와 Mikado아래의 고위 관리직 명칭 'Uchchi'와 'Kabane'와 똑같다.
이와함께 야마토정권아래 통치구역으로서 현재의 군(郡)에 해당하는 '구니'및 그 아래 단위인 '아가타'도 각각 비자야왕시절의 Kuni와 Agata와 그 발음과 뜻이 모두 일치한다.
이처럼 아시아 전체에서 정복개국설화로서 가장 오래된 원형설화로 손꼽히는 스리랑카 초대왕 비자야왕이야기에 나오는 명칭들을 그대로 모방하여 일본의 명칭에 갖다 붙인 것으로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이는 비자야왕설화를 비롯한 스리랑카왕국의 역사를 입수하여 철저히 파악한 수로왕세력을 주축으로하는 가야인들이 쓰시마섬에서부터 일본열도 동쪽으로 진출,정복해나가면서 스리랑카 왕국의 정복사를 금과옥조로 삼아 그 명칭들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이처럼 명칭을 붙인 주체가 가야인들이 아니라 저 멀리 배를 타고온 스리랑카인들이거나 혹은 스리랑카왕국의 이야기를 파악한 일본 토착민들으로서 일본 열도를 개척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나 그러기에는 한중일 3국 역사서의 기록을 엄청나게 뛰어넘는 상상력을 요할 것이다.
결국, '야마토 다다시( 大和 魂)', '전함(戰艦) 야마토(大和)'등에서 보듯이 국수주의자들이 내걸었던 집단 의식으로서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서 표현하는 단어 '야마토(大和)'도 알고보니 스리랑카의 역사에서 따온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여실히 알 수가 있다. 마치 교토(京都)가 처음엔 중국 당나라의 수도 낙양(洛陽)을 모방, 도시계획을 하면서 한때 '낙양'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처럼.
한국타밀연구회 김정남
[email protected]
(출처 :
http://www.kyunggi.ca/bbs/view.php?id=kgcanada&no=530)
김정남 통신원 약력
- 재 캐나다 언론인
- 현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토론토 주재 통신원
- 토론토 발간 한국일보 근무
- 전 문화일보 국제부장
-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 공모에서 이민수기 '잃어버린 왕궤를 찾아서'로 우수상 수상
- 뉴스메이커에
‘가야 초대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는 인도 타밀 출신이다’
‘석탈해도 인도 타밀지역에서 왔다’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는 가야인이다’등 3편의 발굴기사 게재
boanerge
그런데... 가락(가야) 지방 출토 유물들이 북방 훈족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감안을 해야 할 것인데, 북부 지역으로 들어온 북방의 드라비다 인의 한 지파로서의 조선천독을 전제한다면 연결되어지는 면이 생긴다... 12/23
boanerge
http://www.kyunggi.ca/bbs/view.php?id=kgcanada&page=3&sn1=&divpage=1&sn=on&ss=on&sc=off&keyword=김정남&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30
이 기사도 흥미진진한 것이다. 12/23
boanerge
"석탈해가 자신의 부친을 다파나국의 함달파(含達婆)왕 , 줄여서 함달(含達)왕이라고 밝히고 있는 데 함달파 (함달)는 타밀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신 '한다파(Handappa), 줄여서 '한단(Handan)'과 거의 일치한다."
문제 투성이 환단고기를 역사로서는 문제성 있다고 하고, 신화로서는 어느 정도 신화 성격을 말한다면, 중앙아시아에서 살았던 BC 20세기 이전의 범드라비다 세력의 어떤 것?
시인 김지하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중앙아시아를 매우 중시하였었다.2/23
boanerge
범드라비다 시대에는 아리안 족의 대이동 전이라서 힌두교가 성립되지 않은 때였다. 즉, 카스트제도의 굴레 문제나 베다문학이라는 것이나 우파니샤드 철학 훨씬 이전의 이야기인 셈이다.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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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재는 인도 남부 드라비다 인들은 '한단'을 '시바'보다 하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theomakia 의 투쟁에서 패배한 것을 암시한다. 12/23
boanerge
theomakia 란 옛날에 부족끼리 혹은 나라끼리 전쟁을 하면서 내세우는 자기네 신들 사이에서도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오마키아' 곧 '신들의 전쟁'인 셈이다.
이러한 전쟁 개념은 앗수르 인들이나 바벨로니아 인들이 이스라엘로 쳐들어 왔을 때에도 주장된다.